古代奈良の歴史を歩いてまなぼう!

교키(行基)

고대에 있어서 나라(奈良)는 일본 정치・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여기서는 고대 나라 역사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을 소개하겠습니다.

  • ■교키(行基)
  •  교키(行基)는 조정이 백성들에게 포교를 금지한 나라시대 때, 긴키(近畿)를 중심으로 백성들 사이에 널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명하며 각지에서 여러가지 사회사업을 실시하고 사람들로 부터 숭배를 받아 왔습니다.
     그후 쇼무(聖武)천황의 대불상을 만드는데 협력하여 일본에서는 처음인 대증정(大僧正)에 임명 되었습니다.
     교키보살(行基菩薩)로 숭배받는 교키(行基)의 생애를 읽어 봅시다.

    교키보살상(行基菩薩像) 사진제공:사카이시박물관(堺市博物館)
  • 1.젊을때의 수행과 수학
  •  682년 교키(行基)는 15세때 출가 했습니다. 출가는 삭발을 하고 불교에 입문하는 것으로, 12살 이상자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691년 교키(行基)는 24살때 수계를 받았습니다. 수계란 계(戒)를 전수하는 법사로부터 지켜야 할 계(戒)를 전수 받는 것입니다. 스승을 따라 산속에서의 수행에 임하는 한편, 아스카데라(飛鳥寺)에서 경전학습도 열심히 했습니다.
     704년 교키(行基)는 산속과 아스카데라(飛鳥寺)를 왕복하는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 왔습니다. 705년~712년사이에는 이코마(生駒)산 지방에서 어머니의 간호를 했고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는49제의 애도 생활을 하면서 향후의 삶을 모색 했다고 합니다.

    아스카데라(飛鳥寺) 사진제공:아스카무라 교육위원회(明日香村教育委員会)
  • 2.포교 개시와 국가의 탄압
  •  이코마(生駒)산 지방에서 경전 독해를 하면서 여러가지를 고민한 결과, 교키(行基)는 행동을 개시하여 절 건설 등을 시작 했습니다만, 백성들에게의 포교 활동은 이것보다 조금 빨리 시작되어, 후세야(布施屋)를 먼저 건설 하였습니다. 후세야(布施屋)란 세금을 도성에 운반하는 사람이나, 도성을 만들기 위해 모인 사람들 등, 왕래하는 사람들에게 숙박과 음식을 제공하는 시설로, 그 건설 연대에는 헤이죠쿄(平城京)를 건설 할때 쯤이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717년4월, 겐세이(元正)천황은 교키(行基)를 따르는 사람들의 나쁜짓을 규탄 하였습니다. 그 나쁜짓이란, (1)승려는 절에 머물면서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데 교키(行基)의 집단은 절 밖에 나가서 백성들에게 포교를 하는것, (2)탁발(托鉢)은 허가가 필요한데, 무허가로 탁발을 하며 먹을것 이외의 것을 요구 하는 것의 두가지였습니다.
     722년 7월, 우의정(右大臣)나가야왕(長屋王)의 정권은 승려들에의 신령(新令)을 발표하여 위반한 승려는 처벌하고, 고향에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이 금지령(禁令)의 대상이 된 교키(行基)는 처벌받은 기록은 없으나 어쩔 수 없이 고향에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것은 나가야왕(長屋王)이 실각되는 729년 2월까지 교키(行基)의 활동이 고향인 이즈미(和泉)와 가와치(河内)에 한정 되어 있는 것으로 알수가 있습니다.

    간고지 고쿠라쿠보그림 상권(元興寺 極楽坊縁起絵巻上巻)(부분) 사진제공:간고지(元興寺)
  • 3.교키(行基)집단의 공인과 대불상 건립
  •  나가야왕(長屋王)의 실각후 후지와라씨(藤原氏)를 중심으로 한 체제가 성립되어 731년에는 교키(行基)를 따르는 신자중에 남자는 61세 이상, 여자는 55세 이상은 다 출가를 허가 받았습니다. 이 신자들은 허가없이 삭발을 하고 교키(行基)를 따르고 있었지만 쇼무(聖武)천황은 그 위법을 용서하고 출가를 공인 하였습니다.
     741년에 작성되었다고 하는 기록에는 가교(架橋)6군데, 직도(直道)한군데, 연못 15군데, 홈 7군데, 항구 2군데, 운하 4군데, 후세야(布施屋) 9군데의 명칭과 소재지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교키(行基)와 그 집단이 741년까지 성취한 사회적 활동의 결과이고 조정이 여기까지의 교키(行基)에 대한 금지령을 그만두고, 그 활동을 공인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공적인 기록으로 보고 있습니다.
     743년 쇼무(聖武)천황은 대불전 건립의 명을 내리고 교키(行基)는 대불상을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협력을 부탁 했습니다. 이것으로 745년 정월, 교키(行基)는 대증정(大僧正)<당시의 최고 승려>에 임명 되었습니다.
     749년2월 교키(行基)는 스가와라데라(菅原寺)에서 사망 했습니다. 유언에 따라 이코마산(生駒山)에 매장되었고, 유골이 담긴 은으로 된 병에는 제자들이 만든 교키(行基)의 전기가 새겨졌습니다.

    시쇼노미에(四聖御影) 에이와본(永和本):사진제공(写真提供):나라 국립 박물관(奈良国立博物館)
    촬영(撮影):사시키 쿄스케(佐々木香輔):도다이지 소장(東大寺 所蔵)
  • 4.교키(行基)신앙의 발전
  •  교키(行基)가 죽은 뒤에도 제자들이 인정을 받고 건설한 사원(寺院)이 보호 받는등 교키(行基)의 공적이 치하 되었습니다.
     1235년 교키(行基)의 묘가 발굴되어 교키(行基)의 유골이 담긴 은으로 된 병등이 발견 되었습니다. 그후 묘소에는 찌쿠린지(竹林寺)가 세워졌습니다.
     1259년 3월, 도다이지(東大寺)대불전에서 교키(行基)의 사리(舎利)공양회가 열렸습니다.
     1998년11월7일 「교키(行基)보살 관련의 사원」642개 절에 의한 교키(行基)1250년 원기법회(遠忌法要)가 도다이지(東大寺)대불전에서 열렸습니다.
     지금도 교키(行基)의 신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적 교키의 묘(行基の墓)/치쿠린지(竹林寺) 사진제공:나라현 지역 진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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